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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C한정 ss #09 루비레
    디그니티 프로덕션/ss 2021. 6. 15. 00:39

    2021/6/15
    (*장마가 시작된 날)



    “우와……엄청 쏟아지네”

    가까운 상가의 캐노피 밑으로 비를 피해 들어간 마시로는, 흐릿한 색을 한 하늘과, 두꺼운 커튼마냥 내리는 비를 올려다보며 원망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속았다. 아까까지 흐릿하게 햇빛이 비치고 있었고, 폰으로 확인한 일기예보도 비와 흐림, 반반이었는데.
    일단 물방울투성이가 된 안경을 벗고, 베이스 케이스의 겉부분을 가볍게 타월로 닦았다. 파트너가 무사한 걸 확인하고 케이스에 레인커버를 덮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이런 일만 생기네)
    습기 때문에 정리가 안 되는 머리. 손톱 뿌리부터 벗겨진 검지손가락의 젤네일. 집어든 셔츠는 한가운데의 단추가 행방불명. 새로 산 에나멜 구두에는 모르는 새에 눈에 띄는 생채기가 나 있었다. 밖에 나왔더니, 역까지 가고 나서 폰을 두고 온 걸 깨달아서 가지러 가게 되고——아아, 그래. 그 때 우산을 갖고 왔으면 됐는데. 고생한 탓에 세팅한 머리가 다 망가졌다.
    그렇다고는 해도, 뭐어, 어떤 것도 큰 일은 아니다.
    (그치만, 수수하게 짜증난단 말이지이)
    장마 시기 특유의 이것저것도, 내 멍청한 실수도. 새 밴드가 다른 프로덕션에서 데뷔하는 것도, 이유 없이 싫은 녀석이 TV에 나와서 우쭐한 얼굴 하는 것도, 빈정대는 기사가 나오는 것도.
    큰 일은 아니다.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나는 건, 분명 이 울적한 날씨 탓이다.


    “어라아, 마시로상이잖아!”

    갑자기, 투명한 목소리가 불렀다.

    “츠구미군”
    “우와아, 베이스 괜찮아?”

    달려와서 제일 먼저 말한 게, 그거.
    무심코 “나, 츠구미군의 그런 점을 좋아해” 하고 말하고, 웃었다.

    “엣, 어떤 점?”
    “그냥 한 말이야. 베이스는 괜찮아, 나는 보이는 대로 흠뻑 젖었지만”
    “머리가 그래서 순간 누군지 몰랐어. 마시로상, 우산은?”
    “우산 있었으면 이렇게 안 젖거든. 뭐, 베이스 등에 메고 있으면, 우산 잘 쓰기 힘들지만”
    “아—그런가”
    “그리고 나, 우산 들고 다니는 거 싫어한단 말이지”

    짐이 많은 건 좋아하지 않는다.
    물건이 하나 늘어나면, 하나 만큼 더 손이 가게 된다. 좋은 컨디션으로 오래 쓰려면 관리해야 하고, 잔뜩 들고 다니면 손이 가득 차 버린다.
    뭘 어떻게 해도 팔은 두 짝 밖에 없다. 이것도 저것도 욕심내다가 전부 끌어안지 못하고 떨어뜨릴 바에야, 몸이 가벼운 편이 낫다.

     


    “우산, 귀찮단말이지이. 깜빡하면 잃어버리고. 엄청 늘어나고”
    “게다가 우산 사면 비 그치지 않아?”
    “맞아맞아! 아. 그치만 나, 빗방울이 닿는 소리는 좋아해”
    “헤에?”
    “비 오기 조금 전의 냄새도 좋아하고, 우산도 여러 가지 색 있어서 예쁘고”
    “우와아 긍정적이네”
    “즐거운 편이 좋잖아? 좋아하게 된 쪽이 이기는 거라고”

    그 말로 문득 떠올렸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의 라이브. 그 최악의 날씨에 “이긴거나 마찬가지야” 하고 웃어넘기면서 “이 날이 평생 기억에 남게 될 거야” 라던 그 녀석의 말은 진짜로, 진짜였다. 짜증나지만.
    (역시 조금 닮았단 말이지)
    둘 다 낙관적인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기가 막히면서도 “그랬으면 좋겠다” 하고 믿고 싶어진다.

     


    “그럼 츠구미군, 나랑 친해져 두면 좋을지도 몰라”
    “어째서?”
    “나, 아메오토코니까”
    “에—진짜로”
    “진짜로. 최근 3년 정도는 특히. 그건 그렇고, 어째서 이런 데에 있는 거야?”
    “알바!”
    “아—편의점”
    “그래. 들렀다 갈래?”
    “안 들를 거거든”
    “에— 우산 사자. 아니면 비옷. 그럼 분명 비 그칠 거야!”
    “내 아메오토코 실력 얕보지 말라고”
    “사면 그친다고 마시로상도 말했잖아 아까”
    “그건 그렇지만, 최근 3년은 기세가 엄청나거든”
    “그래도 나, 엄청나게 하레오토코야! 라이브도 소풍도 비 온적 없어!”
    “경쟁하지 말라고”
    “그치만 마시로상, 루비레인걸!”

    무심코 뿜어 버렸다.
    (루비레의 마시로, 말이지)
    듣고 싶은 말이 딱 맞게 돌아온다.
    (역시 닮았어)
    조금도 기죽지 않고 “갖고 싶어” “이기고 싶어” 하고 말할 수 있는 강함.
    뻔뻔하면서도 상쾌한, 이 느낌.

     


    “아, 봐봐. 역시 내가 이겼어!”

    손으로 가리킨 끝에는, 어느 새엔가 빌딩과 빌딩 사이에 옅은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거짓말이지”
    “진짜야진짜야”

    깨끗이 완패한 나는 “어쩔 수 없네. 편의점에서 담배라도 살까” 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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